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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시아 6

가르시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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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설정 까먹은 듯.

그 감정에 대해 복잡하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보르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지나온 세월의 흔적은 그를 배신했지만, 오로지 충동만이 등을 떠밀었다. 이보르는 허리춤에 매인 칼을 빼들고 무작정 달려들었다. 궁지에 몰린 들쥐가 된 기분이었다. 떨리는 손이 유일한 생명줄처럼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이놈…….”

“죽이면 안 돼!”

뒤편에 물러나있던 장성의 사내가 뛰쳐나오고, 무리에 섞인 누군가가 새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른 무엇보다도 익숙한 목소리였으나,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이보르는 앞으로 달려 나온 사내와 정면으로 맞부딪쳤다.

옷을 찢고 어깨를 스치는 차가운 날의 감촉이 선명했다. 비틀거리며 옆으로 빠진 이보르는 사내의 품에 파고들었다. 이보르의 칼이 사내의 복부를 꿰뚫자, 맞닿은 몸이 부르르 떨렸다. 등으로 뚫고 나온 칼날에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을 질렀다.

커다란 몸이 시야를 가리고 있는 것이 불편했다. 이보르는 본능적으로 손목을 꺾어 몸에 박힌 칼을 뽑아냈다. 당연하게도 힘 같은 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사람의 몸은 너무나 쉽게, 아무런 저항감 없이 종이처럼 반듯하게 잘렸다. 이보르는 그를 덮은 사내의 몸에서 쏟아진 핏물을 죄다 얼굴로 뒤집어썼다. 비릿한 피 내음이 점막을 파고들었으나, 그런 것을 일일이 의식할 틈은 없었다.

상반신이 반으로 잘린 사내의 몸이 쿵,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졌다. 그 소리가 귀에 닿기도 전에 다른 이들이 달려들었다. 첫 살인이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두려움이 일지 않았다. 공포심이 들기는커녕 강한 긴장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피가 부글부글 끓었다.

무슨 정신으로 그들을 상대했는지 모르겠다. 무의미한 연습 같은 건 모두 잊고, 눈앞의 현실에 집중했다. 아니, 현실보다는 차라리 끔찍한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위기를 앞둔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충동에 잠식된 이보르는 엉망진창으로 칼을 휘둘렀고, 알 수 없는 힘이 깃든 날은 스치는 모든 것을 동강냈다.

주홍 등불이 일렁이는 방 안에 잘린 신체와 내장이 쏟아졌다. 머리에 피가 몰리며 시야가 벌겋게 물들었다. 사실 눈앞이 짙고 어두운 색채로 물드는 것은 얼굴에 튄 핏물 탓일지도 모른다.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자가 내는 앓는 소리,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의 비명. 모든 것이 물속에 잠긴 것처럼 먹먹하게 들렸다.

처음에는 약간 거슬렸지만, 그조차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핏물을 가득 머금어 축축해진 양탄자 위에서 숨을 거뒀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보르는 피가로의 목을 베어낸 자와 칼을 맞대고 있었다. 그 자와 맞붙는 동안에도 이보르의 관심은 온통 피가로에게 쏠려있었다.

피가로는 젖은 양탄자에 코를 박은 채 미동조차 없었다. 핏물이 벌컥벌컥 쏟아지고 있는데도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 말도 안 되는 가능성에 매달리느라 눈앞의 사람이 뭐라고 소리쳐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부모는 자식의 거울이라는 말이 있다. 이보르의 어머니, 그레타는 손속이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악귀에 씐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악착같은 그레타는 당한 것은 반드시 몇 배로 돌려주었다. 그런 그레타 밑에서 교육받고 자란 이보르는 피가로의 숨을 앗아간 상대에게 곧장 잔인한 보복을 가했다.

날카로운 칼날이 불빛을 반사하며 상대의 얼굴이 비쳤다. 이보르는 틈을 놓치지 않고 상대의 칼과 함께 목을 베어냈다. 공중으로 뜬 얼굴은 충격으로 물들어있었다. 부릅 뜨인 눈이 뎅겅 잘려나간 날을 향했으며, 크게 벌어진 입은 소리 없이 비명을 질렀다.

고작 그뿐인 일이다. 이보르는 머리가 굴러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지 않고 서둘러 피가로에게 달려갔다.

“피가로, 피가로님!”

피로 흠씬 젖은 칼자루가 미끈거려 더 이상 쥐고 있을 수가 없었다. 손아귀의 힘이 풀리자 쓰임새를 다한 칼이 떨어졌다. 경쾌한 금속 소리를 내며 날이 먼저 바닥에 부딪쳤다. 이보르는 무의식중에 더러워진 두 손을 몇 번이고 옷에 문질러 닦았으나, 입고 있는 옷 또한 피로 물든 탓에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피가로님, 제발 눈을 뜨세요…….”

이보르는 피가로 앞에 납작 엎드려 그의 상태를 살폈다. 차마 흔들지도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어깨를 감싸기만 했다. 그럼에도 피가로는 움직이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능청스럽게 고개를 들고 웃어줄 것 같은데, 그는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직 육신은 굳지 않고 부드러웠다. 숨은, 확인하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그러나 아는 것이 무서웠다. 이보르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두렵고, 두려워서 한기가 들지만 그럼에도 직접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피가로가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이유로 숨이 붙어있는 상태라면 조금이라도 서둘러야 했다.

이보다 더 뜸을 들이면 눈물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의 실수로 피가로가 죽는다니, 상상만으로도 공포스러웠다. 피가로의 머리를 감싼 이보르가 그를 품에 안으려고 할 때였다.

“신의 말을 거역하다니, 나쁜 아이구나.”

온통 갈라진,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나지막이 중얼거린 피가로가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찢어진 목에서 피거품이 부글부글 끓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피가로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서 웃어줄 거라고,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현실이 되니 어안이 벙벙했다.

“덕분에 기껏 마련해놓은 안배가 물거품이 되었잖아.”

“피가로…….”

사람은 불안함을 느낄 때 가장 먼저 상대의 표정을 살핀다. 피가로는 마른 피가 뒤엉켜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었고, 이보르는 그의 무감각한 얼굴에서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피가로는 방금 막 잠에서 깬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아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가로는 마을 사람들의 소원을 전부 들어주진 못했지만, 상냥하고 자비로운 신이었다. 이보르가 아는 피가로라면 지금쯤 충격적인 일을 겪고 상심한 그를 다정하게 달래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피가로는 이보르를 위로하지도, 부드러운 포옹을 돌려주지도 않았다.

피가로는 맨발로 피와 내장을 밟으며 걸어갔다. 앞만 보고 나아가는 그에게 어둠은 그다지 방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떨어진 초에서 불씨가 옮겨붙었다. 방 안의 촛불이 하나둘씩 켜지며 순식간에 주위가 환해졌다.

그제야 방 안의 참상이 눈에 들어왔다. 머릿속에 오로지 피가로를 구할 생각밖에 없었던 이보르는 자신이 한 일을 세세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마구잡이로 굴러다니는 조각난 시체들은 끔찍한 사고나 학살에 휘말린 것 같은 모양새였다.

본능이 경고를 울렸다. 어째선지 자세히 보고 싶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트라우마로 남을 법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건 그 부분이 아니었다. 칼날에 반사된 불빛이 잔상처럼 뇌리에 맺혀 사라지지 않았다. 경악에 물든 낯이 찰나의 기억 속에 번뜩였다.

너무나 선명한 얼굴이었다. 꿈을 꾸는 것처럼 지독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종잇장처럼 단번에 잘려나간 머리를 떠올리기 무섭게 피를 흘리며 쓰러지던 사내의 얼굴이 덧대어졌다. 그 뒤로 잘려나간 팔다리의 단면을 붙잡고 울부짖는 사람들의 얼굴이 잇따랐다. 영혼이 빠져나간 허망한 모습보다는 이보르가 아직 어릴 적 웃으며 목말을 태워주던 모습이 더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가까운 타인의 죽음은 쉽사리 와닿지가 않는다. 이보르는 넋을 놓고 주저앉은 채 피가로를 쳐다봤다. 비틀거리는 걸음은 어느새 안정적으로 바뀌었고, 반쯤 잘려 덜렁거리던 목도 반듯하게 서있었다. 상처가 봉합되면서 덩달아 출혈도 멎은 것 같았다.

피가로가 살아있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분명 숨이 멎을 정도로 큰 상처였다. 마법이라는 편리한 기적이 있는데도 평소 마법의 존재를 등한시해온 이보르는 바로 그것을 떠올리지 못했다.

“어떻게…….”

그렇게 해서 튀어나온 게 어리석은 혼잣말이다. 피가로는 익숙하면서도 조금은 낯선 목소리로 핀잔을 놓았다.

“지금 내 얘기를 할 때가 아니야. 도망가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뒤를 생각해야지.”

은은한 불빛이 번지는 방 안에 핏물로 흠씬 젖은 소년이 서있었다. 맨발을 핏덩이로 물들이며 나아간 피가로는 발치에 굴러다니는 머리를 느릿느릿 들어 올렸다.

“천치 같으니. 넌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모르는구나.”

어떠한 의식처럼 높이 들어 올린 머리에 등불의 빛이 고정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보르는 아직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다. 마을을 둘러싼 학살의 진실도, 알 수 없는 충동이 이끈 눈앞의 상황도. 애초에 그 모든 것을 피해 이곳에 온 거였다. 하늘의 비호를 받는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답게, 신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그러나 이보르의 신은 그가 저지른 참상 속에 그저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다른 평범한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붉은 피를 가진 신은 어떠한 설명 하나 없이 두 손에 든 누군가의 머리를 내밀었다. 이보르가 여태 외면하던 것. 너무나도 낯익은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어머니.”

꽉 막힌 목구멍을 비틀며 흘러나온 목소리는 자신의 것 같지 않았다. 살덩이에 불과한 혀 밑에 끈적한 타액이 고였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런 마을에서도 친족 살해는 중죄였다. 하물며 자식이 부모를 해치는 건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너무 강한 충격을 받으면 생각은 정지한다. 반대로 마음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외부의 자극을 차단한다.

이보르는 하나뿐인 부모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어떤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절망이나 죄악감 같은 당연한 감정조차, 촘촘한 빗장을 걸고 내부로 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주어진 복을 스스로 걷어찼으니 이제 어떻게 할 셈이야?”

피가로는 이보르가 자신의 죄를 회피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손에 든 잘린 머리만큼이나 새하얀 안색으로, 그는 계속해서 답을 요구했다. 질문의 무게와 달리 바라보는 눈빛은 짓궂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 속에서 가벼운 농담을 건네듯 말이다.

그 비현실성에 오히려 정신이 번뜩 뜨였다.

“어,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어떤 대가든 치를 테니 제발…….”

어느새 이보르는 피가로의 발치에 납작 엎드려있었다. 부모에게 혼나는 아이처럼 두 손을 싹싹 빌면서도 혹여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피가로의 옷자락 한 번 붙잡지 못했다. 그러나 피가로는 짐짓 안타깝다는 듯 “아아.” 하고 웃었을 뿐이다.

“무리야.”

피가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듯 산뜻하게 말했다.

“설령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가 와도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건 불가능해.”

앞서 피가로는 죽은 사람을 살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몇 번이고 말했었다. 피가로는 위대한 신이니까 무엇이든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피가로는 기가 차다는 듯 웃었을 뿐이다. 마을의 신이자 신전의 주인으로서 제사를 주관하는 피가로가 그런 부탁을 얼마나 많이 받았을지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전부 머리로는 납득했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한때는 피가로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던 적이 있다. 자신의 일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무작정 신에게 매달리는 사람들이 나약하다며 비판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의 입장이 되니 신을 부르짖게 되었다. 하다못해 신이 아니라면 시도조차 해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절망 때문이었다.

피가로의 손에서 그레타의 머리가 굴러떨어졌다. 이보르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으나, 빠르게 낙하하는 머리를 끝내 붙잡지 못했다. 어머니의 잘린 머리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처럼 바닥을 나뒹굴었다.

부정 다음에 찾아온 건 분노였다. 도탄처럼 튄 분노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향했다. 비척비척 일어선 이보르는 피가로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째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야? 저 사람들이 너를 해치려고 했잖아! 왜 그런 순간까지 가만히 손을 놓고 있었던 거야?”

피가로가 방관하는 태도를 취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피가로는 마을의 인간들을 두루 살폈지만, 그가 보이는 건 정말 최소한의 관심에 불과했다. 피가로는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신으로서 모두를 내려다봤다. 애초에 일반적인 사람과는 아예 관점이 달랐다.

의견을 모으지 못하고 분열하는 마을도, 강경파의 불순한 움직임도. 진작 나섰다면 문제가 심화되기 전에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네가, 네가 진작 모두를 제지했었더라면…….”

눈물로 얼룩진 입술에선 불쾌할 정도로 짠맛이 났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이보르, 넌 한 가지 착각하고 있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할 수가 없었던 거야.”

피가로는 이보르가 흔드는 대로 맥없이 흔들렸다. 그는 한참을 휘둘리다가 이보르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난 이 마을 촌장이 추대한 외부의 신이잖아. 나는 처음부터 그런 이 땅에 묻힐 운명이었어. 그렇다고 얌전히 당해줄 생각이었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계승 정도는 끝까지 책임지려했지.”

“……뭐?”

“아직도 모르는 거야? 원래 신이 되어야 할 존재는 너였잖아. 이제야 막 원래대로 돌아가려던 참이었는데 네가 모든 걸 망친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나, 하나도 이해가…….”

피가로는 어릴 적 침구 안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보르의 손을 감싼 채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넌 정말 어리숙하구나. 그레타가 답답해하던 것도 조금은 이해가 돼.”

피가로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이보르는 자세한 설명을 바랐지만, 피가로는 더 이상의 대화가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까치발을 든 피가로는 또래 아이치고 큰 두 손으로 이보르의 머리를 붙잡았다.

“나도 알아. 알고말고. 이대로 끝내기엔 슬프고 답답하겠지. 그러니 내 기억을 보여줄게. 백 마디 말보다 직접 보는 편이 이해가 쉬울 테니까.”

피가로는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얼마나 폭력적으로 다가올지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지극히 본인만의 기준으로 자비롭게 손을 내밀 뿐이다. 평생 신에게 의존하며 자라온 마을의 아이들은 하늘의 부름을 거부하지 못했다. 그건 신과 어릴 적부터 함께 해온 이보르도 마찬가지였다.

이보르는 피가로에게 몸을 맡긴 채 무기력하게 눈을 감았다. 시야가 캄캄하게 물들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저절로 눈꺼풀이 열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이보르는 낮과 밤을 알 수 없을 만큼 새하얀 설원에 홀로 남겨져있었다.

이보르는 혼란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떠한 생명도 존재하지 않는 설원은 어둠 한 점 없이 빛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너무 강한 빛에 망막이 타들어가는 듯했다. 그러나 뻑뻑한 눈에선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무릎까지 소복하게 쌓인 눈에 파묻힌 이보르는 따끔거리는 눈을 비비려고 했으나, 곧 자신의 몸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저 멀리 시야 끝에서 사람의 인영이 비쳤다. 이보르는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깊이 쌓인 눈더미를 힘겹게 헤치며 나타난 것은 서른 명은 족히 될 법한 사냥꾼 무리였다. 북쪽 나라의 여느 마을이 그렇듯, 두툼한 짐승의 가죽을 걸친 이들은 사뭇 위압적인 기세를 풍겼다.

사냥꾼들은 외진 설원에 그들 외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멈춰 섰다. 긴장감은 있었으나, 적대감은 없었다. 있을 리 없는 장소에 존재하는 낯선 사람을 보고 놀라지 않는 것을 보면 예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우두커니 서있는 이보르를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예언은 사실이었어.”

“역시 그 마법사의 예언은 절대적이다.”

“괜히 세월의 마법사라 불리는 게 아니겠지!”

마법사.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표현이었다. 마법사라는 존재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가 질색하며 싫어해도 피가로는 언제나 자신을 ‘마법사’라고 칭했다.

내색하진 않아도 피가로는 외로움을 굉장히 잘 탔다. 언제나 피가로의 곁을 지켜온 이보르만이 알고 있는 정보였다. 처음에는 피가로가 유별난 괴짜라서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가상의 존재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순히 피가로가 자신을 위해 만든 단어라기엔 앞뒤가 맞지 않았다.

척박한 북쪽 땅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연의 무서움을 배운다. 그중에서도 시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눈부신 설원은 미지의 바다만큼이나 위험한 장소였다. 그러니 이곳에 덩그러니 있는 이보르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그들이 그런 의미를 주고받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저희와 함께 갑시다.”

“저들의 말은 듣지 마십시오. 비옥한 토지를 지니고도 만족할 줄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부디 제 손을 잡아주십시오.”

“아닙니다. 도움이 절박한 건 저희입니다. 당신이 와주지 않는다면 우리 부족은 기나긴 밤을 버티지 못할 겁니다.”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복식을 하고 있는 그들은 앞다투어 손을 내밀었다. 초면일 게 분명한 그들의 시선은 경외로 가득 차 있었다.

이보르는 그제야 그들의 눈에 비치는 게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레타는 마을에서 알아주는 뛰어난 사냥꾼이었고, 그런 어머니 밑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이보르는 단 한 번도 이렇게 작고 마른 모습을 하고 있었던 적이 없었다. 애초에 어리고 유약한 이보르의 삶은 타인의 경외와는 거리가 멀었다. 덕분에 어떠한 연유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떠올릴 수 있었다.

피가로다. 이보르의 친우이자 마을의 멸망의 원인을 제공한 위대한 신이 그를 자신의 기억 속에 가두었다. 이보르는 피가로의 눈을 통해 이미 지나간 과거를 되돌아보고 있었다.

피가로는 어째서 내게 옛 기억을 보여주는 걸까? 이제 와서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런 당연한 의문을 품었을 때였다.

“당신을 모실 자격이 있다는 걸 증명하면 되겠습니까?”

여태 조용히 있던 한 남자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보르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남자에게서 낯익은 느낌을 받았다. 착각한 게 아니라면 촌장이었다. 그것도 십 년은 더 젊은 모습 말이다.

‘촌장님이 왜…….’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의 모습에 당황하기도 잠시, 이보르는 다시 한번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피가로의 과거라는 사실을 되새겼다.

‘설마 피가로가 우리 마을에 오게 되었을 때인가?’

이보르가 아직 사고뭉치일 시절, 촌장은 마을 밖에서 피가로를 데려왔다. 피가로는 완벽한 외지인이었고, 폐쇄적인 마을에선 이형의 힘을 가진 존재를 몰아내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했다.

외부에서 온 작고 사랑스러운 신 님은 첫 소개부터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반대 세력을 몰아내고 사람들을 무릎 꿇렸다. 반감을 품었던 어른들은 반대 집회가 흐지부지된 것에 대해 ‘이유는 모르겠지만 신의 존재를 믿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모호한 답을 내놓았다.

결과적으로 이보르는, 아니, 마을의 누구도 피가로가 촌장을 따라나선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한다. 어쩌면 그레타를 포함한 원로들은 알았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영원히 물어볼 수 없게 되었다. 이보르가 풍랑을 맞은 것처럼 엉망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갈무리하고 있을 때였다.

“마음대로 해.”

피가로가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피가로는 이때나 지금이나 말을 아꼈다.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처럼 무신경하게 배회하던 시선이 촌장에게 가닿았다.

“내 몸은 하나라서 너희 모두를 도울 순 없어. 어차피 흘려야 할 피라면 가치 있는 쪽에 쓰는 편이 좋겠지.”

고작 어린아이의 말 한마디로 분위기가 일변했다. 조심스럽게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사냥꾼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상대에게 무기를 겨누었다. 신기하게도 그 누구도 피가로를 의심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마법사라 불리는 존재를 찾으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언급한 예언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장비 하나 없이 맨몸으로 설원 한가운데에 선 아이는 충분히 이질적이었다.

먼저 창끝을 찔러 넣은 게 누구였던가. 이제 와서 잘잘못을 가리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들이 있는 장소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오염 한 점 없이 순수한 흰빛으로 물든 눈벌에 피와 살점이 점점이 흩뿌려졌다.

사냥꾼들은 짐승을 사냥하고 도축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를 같은 인간에게 휘두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고함을 치고 비명을 지르며 날카로운 칼날을 쑤셔 박았다. 정작 혼란을 야기한 피가로는 눈앞에서 학살이 벌어져도 절대 개입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의 책임도 없는 것처럼 수수방관했다.

치열하게 싸우는 그들 위로 칼을 든 자신의 모습이 덧씌워졌다. 피가 튀고, 잘린 목이 허공을 날았다. 그레타의 원망스러운 눈빛은 끝까지 이보르를 쫓아왔다. 이보르는 어른거리는 환영을 떨쳐내지 못하고 숨을 삼켰다. 간신히 비명을 참고 있을 즈음이었다. 한가로이 싸움을 구경하던 피가로가 입을 열었다.

“내가 잔인하다고 생각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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