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시아 4


3.

이보르가 알기로 마을의 ‘신’ 자리는 한 번도 공석이었던 적이 없었다. 11년 전, 피가로가 오기 전에는 주술사 할아범이 마을의 ‘신’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원래는 신당이 주술사 할아범의 거처였지만, 마땅한 자격을 갖춘 진정한 신이 나타난 뒤로 할아범은 제 발로 신당에서 물러나 마을로 내려갔다. 의무를 마친 그는 이제 마을 외곽에서 편히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주술사 할아범은 마을에 큰일이 닥쳤을 때 한 번씩 언덕을 올랐다. 눈보라가 끊임없이 휘몰아치고 강경파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주술사 할아범은 다시 한번 신당을 찾았다. 신님께 마을을 비호해 주십사 간곡히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피가로님, 부탁드립니다. 마을을 지켜주십시오.”

“넌 이곳에 애착이 있구나. 북쪽의 마법사 답지 않아.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탓인가?”

노쇠한 몸을 이끌고 먼 길을 걸어온 주술사 할아범은 피가로 앞에 무릎을 꿇고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피가로를 대하는 주술사 할아범의 말과 행동은 너무나도 정중해서, 도저히 자기보다 어린 사람을 대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주술사 할아범은 피가로가 처음 마을에 왔을 때부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그에게 큰절을 올렸었다.

주술사 할아범은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읽은 걸까? 어쩌면 같은 ‘신’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주술사 할아범이 피가로에게 가진 알 수 없는 경외심도 전부 이해가 된다.

“할아범은 외부에서 왔잖아요. 다른 마을도 우리처럼 신을 받드는 곳이 있나요?”

“그럼 많지. 북쪽 나라의 기후는 인간에게 불친절하잖니. 지독한 추위와 재해를 이겨내려면 주술사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하단다. 예로부터 정령의 도움을 받지 못한 마을은 오래 가지 못하고 명을 달리했지.”

이보르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그레타의 관리를 받아왔다.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었던 그에게는 친한 친구 하나 없었고, 그래서 더욱 피가로와 주술사 할아범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한때 마을에 둘뿐이었던 주술사로서, 어릴 적의 이보르는 주술사 할아범을 무척 따랐다. 비록 그레타는 주술사 할아범을 정신 나간 노친네라 손가락질하며 두 사람을 갈라놓았지만 말이다.

“피가로…… 아니, 신님은 어디에서, 어쩌다가 우리 곁으로 오게 되었을까요?”

“그 이전에도 어딘가의 신으로 계셨겠지.”

“일곱 살 이전에요?”

“태어날 때부터 신의 운명을 타고나셨을 거야. 피가로님처럼 강력한 힘을 가진 분은 이 북쪽 어느 마을에서든 떠받들었을 테니.”

그 말대로 피가로는 처음부터 신의 역할에 능숙했다. 당시 그의 나이 고작 일곱인데도 말이다. 피가로는 누가 알려주고 이끌어주지 않아도 스스로 능수능란하게 움직였다. 그게 당연했다. 피가로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신님이었으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존재만으로 절대적인 믿음을 줄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이보르는 입을 헤 벌린 채 감탄을 금치 못했고, 주술사 할아범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넌 여전히 호기심이 왕성하구나. 어릴 적부터 그랬지. 뭐든 궁금한 건 못 참고, 직접 해보지 않고는 못 배겨서 그레타의 속을 참 많이 썩였어.”

“……할아범, 또 옛날 얘기를.”

“알았다, 알았어. 네가 싫다면 하지 않으마.”

주술사 할아범은 이보르의 등쌀에 못 이겨 어영부영 화제를 돌렸다.

“네가 관심 있는 건 피가로님에 관한 거겠지. 하지만 나는 피가로님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단다.”

주술사 할아범은 정작 이보르가 가장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는 단칼에 거절했다.

“이보르, 너를 아껴서 하는 말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그분을 거역하지 말거라. 만일 그분이 벌을 내리겠다 하시면 그것이 무엇이든 달게 받아야 한다.”

검지를 세워 강조하는 주술사 할아범은 보기 드물게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보르는 주술사 할아범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주술사 할아범은 가끔 피가로가 아주 무서운 존재인 양 말을 하곤 했지만, 피가로가 어떤 사람인지는 주술사 할아범보다 이보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피가로는 다정하고 상냥한 우리의 신이다. 설령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 해도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피가로님이 제게 벌을 내리실리 없어요. 저흰 친구인걸요.”

“…….”

피가로는 지금 북쪽의 날씨를 조종하는 다른 신처럼 제멋대로에 변덕스러운 신이 아니었다. 그는 결코 악신 같은 존재가 아니다. 피가로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인지 모두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물론 이건 신당을 제 집처럼 드나들며 피가로를 압박하는, 그레타를 포함한 강경파에게도 해당되는 사안이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들이댔으나, 주술사 할아범은 슬픈 눈빛으로 이보르를 보았을 뿐이다.

“그래, 그 말도 일 리가 있구나. 하지만 피가로님을 안다 한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 피가로님이 선택하신 이상,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분을 지켜야 한단다. 그리고 그건 이보르,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부탁하마.”

“할아범…….”

잘은 모르겠지만, 주술사 할아범은 아마 그레타를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요즘 마을에 도는 흉흉한 소문과 불길한 기류 때문이다. 그 일의 배후에 강경파가 있다는 건 머리에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터였다. 그래서 주술사 할아범은 그레타의 하나뿐인 가족이자 자식인 이보르에게 그녀를 말려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술사 할아범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레타는 먼 옛날부터 이보르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이보르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아버지를 사랑하지 않았다. 욕심으로 점철된 어머니에게 아버지와 자신은 단지 출세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혼인으로 최소한의 기틀을 다지고, 주술사로 태어난 자신을 이용해 차기 촌장 자리를 거머쥘 계획이었다. 사사건건 족쇄가 되던 아버지의 죽음도 어머니는 내심 행운으로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레타는 그만큼 차가운 사람이었다. 그레타처럼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혈연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상황이 악화되기 전에 무엇이든 해주기를 바랐던 주술사 할아범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보르는 그레타를 막을만한 힘이 없었다.

어깨에 얹힌 짐은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 그런 건 불가능하다고 솔직하게 말하려 했으나, 한편으로는 노인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그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주술사 할아범을 떠나보내야 했다.

*

눈보라는 한 달 내내 지속되었다. 금방 그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예상보다 훨씬 길었다.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정령의 힘을 빌린 그들이 이 정도였으니, 신의 비호를 받지 못한 다른 마을은 상황이 훨씬 나빴을 것이다. 집 밖으로 나가기도 힘든 험악한 눈보라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마을 전체를 거대한 방벽으로 감싸준 피가로 덕분이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대체 뭔지, 건물이 무너지고 식량난에 허덕일 때마다 원망의 말이 절로 나왔다. 주어진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타인을 향해 갈 곳 없는 원망을 마구 쏟아내게 되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보르의 믿음은 굳건했으나, 마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지난 한 달간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처음에는 터전을 잃은 사람들을 공용 회관에 수용했지만, 나중에는 그 자리마저 부족해져 거리에 나앉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집 밖에는 굵은 눈발이 날리는 눈보라와 함께 얼어붙은 시체들이, 집 안에는 쉴 새 없이 기침하는 병자들이 있었다. 기나긴 재해와 여론전으로 마을은 안에서부터 서서히 병들어가고 있었다. 피가로의 말대로 세상에 변치 않는 것은 없었다. 눈으로 보고 지나칠 수 없는 직접적인 피해 앞에서 신을 향한 공경과 사랑도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레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더욱 신당을 압박했다. 인간이란 어쩌면 이토록 어리석은지. 그들은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욕심을 부렸다. 덕분에 이보르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레타는 궂은 날씨에 굴하지 않고 주기적으로 언덕을 올랐다. 동행이 없으면 혼자서라도 신당에 찾아와 피가로를 몰아붙였으며, 희미해진 신권을 짓밟았다. 계속되는 무의미한 호소에 피가로가 몹시 싫증 내는 것이 이보르의 눈에도 여실히 보였다.

매일이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눈보라로 인한 피해 이전에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할 것 같았다. 이보르는 피가로와 그레타 사이에서 수차례 중재를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언제나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며 무리한 요구를 하는 쪽은 그레타였기 때문이다.

그레타는 일련의 면담을 마친 뒤 반드시 이보르를 만났다. 그레타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부모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적이 없었다. 꼴에 자식이라고 챙기는 게 아니다. 그레타가 일부러 시간을 내서 이보르를 만나는 것은 먼 훗날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다져줄 비장의 패를 관리하기 위함이었다.

“어머니, 벌써 한 달째에요. 언제까지 이렇게 시정잡배처럼 떼거지로 몰려다닐 셈이에요? 말도 안 되는 음해로 그분을 모욕하고 위협하는 건 그만두세요. 이제 그만 현실을 바라보고, 이웃을 도울 수 있는 현실적인 방법을 모색하시라고요!”

“내가 누구와 어울리고 무엇을 하든 네가 신경 쓸 것 없다. 넌 네 일이나 잘 하면 돼. 대리인 역할 하나 똑바로 수행하지 못하는 네가 나를 나무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

이보르는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남을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솔직히 말하면 머리가 어찔할 만큼 화가 났다. 이런 이기적이고 악독한 사람이 자신의 부모라니, 차라리 없느니만 못했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볼 일로 오신 거죠? 도대체 누가 명령을 어기고 어머니를 들여보냈나요?”

“너는 또 그 말을 하는구나. 지겹지도 않아? 내 하나뿐인 아들 안부 좀 확인하겠다는데, 누가 날 막는단 말이야?”

“그야 어머니가 항상 피가로님을 못살게 구니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분노로 눈앞이 가물거리는 가운데, 그레타가 보란 듯이 코웃음을 쳤다.

“명색이 신이라는 자가 자신의 직무를 소홀히 여기는데 어떻게 가만히 내버려두느냔 말이다! 이보르, 너야말로 정신 차리렴. 너도, 다른 사람들도 그 어린 것한테 단단히 홀린 거야.”

어린 것. 그 단어가 뇌리에 콕 박혀 사라지지를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위대하신 그분을 그저 그런 평범한 인간 취급하는 것만큼은 견딜 수가 없었다.

“신님께 무례한 언행은 삼가도록 하세요. 당신이 내 친모라고 해도 도를 넘은 행동은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내 아들이지만 넌 정말 용감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구나. 좌시하지 않으면? 대체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이 좁아터진 신당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아온 네가!”

결국은 또 이렇게 되었다. 마주 보고 언성을 높이고 있으니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열 오른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걸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기선 감정을 드러내봤자 손해였다. 어떻게든 마음을 가라앉혀야 했다. 이보르는 한숨을 쉬며 연이어 마른 세수를 했다.

“……그만합시다. 이런 이야기는 이제 됐어요. 지금은 서로에게 필요한 말만 하죠.”

거만하게 턱을 든 그레타는 팔짱을 끼었다. 불만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달리 이견은 없었다. 이보르는 조용히 숨을 삼키고 있다가 격렬한 감정이 전부 연소될 즈음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곧 아버지의 기일이잖아요. 그때가 되면 원치 않아도 얼굴을 볼 텐데, 굳이 미리 만나서 불쾌함을 느낄 필요가 있냐는 거죠.”

“기왕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번에는 혼자 그이의 무덤에 다녀오려무나. 어차피 시키지 않아도 갈 생각이었지?”

“어머니는 가지 않으시는 건가요? 말은 그렇게 하셔도 지금까지 항상 동행하셨잖아요.”

“그날은 중요한 일이 있어서 안 돼. 대신 다른 날에 따로 들리도록 하마.”

그렇게 말하는 그레타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미안함이나 책임감 같은 건 여전히 티끌만큼도 보이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자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울컥하고 치미는 것이 있었다. 이보르는 불편한 기분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아버지의 기일을 빼먹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니, 저로서는 전혀 납득할 수 없지만. 일단 알겠습니다.”

“이 녀석이 끝까지…….”

그레타는 철없는 아이를 대하듯 혀를 찼으나, 결과적으로 화를 내지는 않았다. 폭설 속에 나아가는 것은 고역이지만, 다행히 아버지가 안치된 공동묘지는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잠깐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그레타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돌아갈 채비를 했다. 정말 그 말을 전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듯했다. 계속 멍한 얼굴로 눈 덮인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이보르는 그제야 그레타를 돌아보았다.

“어머니.”

충동적으로 부르기는 했으나, 그대로 돌아보지 않고 떠날 줄 알았다. 이보르가 아는 그레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레타는 마지막 순간에 뒤를 돌아보았다. 지근거리에서 차분한 마음으로 그레타를 마주하고 있으려니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처럼 어머니를 자세히 살핀 것이 언제였는지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마을의 사냥꾼 출신인 그레타는 아직도 정정했지만, 어린 이보르를 돌봐주던 옛날에 비하면 그녀도 많이 늙었다. 눈 밑의 그늘과 얼굴 곳곳에 생긴 잔주름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었다.

“왜 불러놓고 말을 안 해?”

“그게…….”

이보르는 입을 열기 전에 잠시 망설였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결심한 것이 불과 몇 분 전이었다. 하나뿐인 혈육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더 큰 의미를 지녔는지도 모른다. 욕심에 눈이 먼 그레타가 들어주지 않을 걸 알면서도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 눈보라도 지나갈 거예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두가 함께 사이좋게 지내면 안 될까요?”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니.”

헛웃음 끝에 남은 것은 뿌리 깊은 경멸이었다. ‘넌 정말 보잘것없는 사내구나. 네 아비처럼.’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그런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단지 피가 이어졌다는 이유로 상대를 더 잘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억울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크게 상심한 이보르는 떠나는 그레타를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다.

이보르는 긴 복도를 지나 다시 피가로의 곁으로 돌아왔다. 세상이 온통 눈에 뒤덮여 가는 와중에도 그의 옆에 있으면 어김없이 봄볕 같은 따스함이 느껴졌다. 피가로는 투덜거리는 이보르에게 냉정한 조언을 건넸다.

“그레타의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거야. 하나뿐인 가족이잖아?”

“피가로, 너도 알고 있겠지만 내 어머니는 결코 좋은 사람이 아니야. 혈연 같은 건 그 사람에겐 족쇄에 불과해.”

“족쇄라고 해도 말이지. 난 그레타가 너를 소중히 여긴다고 생각해. 부모라는 건 원래 그런 거잖아. 특히 어머니란 존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이 배 아파 낳은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지. 물론 어디서나 예외는 있겠지만. 아, 거기 있는 담요 좀 가져다줄래?”

“……알았어.”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독한 술을 머금은 것처럼 꾹 삼켰다. 피가로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가족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과 같은 속도로 살아갈 수 없는 ‘우리’ 같은 존재들에게는 흔한 일이라며, 주술사 할아범이 말한 적이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아끼는 사람들을 떠나보내는 건 힘을 지니고 태어난 그들의 숙명이라고 했다.

피가로는 이보르가 건넨 두툼한 담요를 무릎 위에 얹었다. 그는 지나가는 말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네게도 너만의 고민이 있겠지.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야. 되도록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마.”

‘앞으로 살아갈 날에 비하면 지금은 찰나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현재를 소중히 여기렴. 네가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테니.’

피가로의 말은 오래전 들었던 주술사 할아범의 말과 겹쳐졌다. 고작 열여덟밖에 되지 않은 피가로가 수백 년을 살아온 주술사 할아범과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이보르는 피가로의 눈치를 보며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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