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집을 피우는 그레타를 몰아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마을에 눈보라가 몰아쳤다. 세상을 우유 거품처럼 하얗게 뒤덮은 눈보라는 마을뿐 아니라 북쪽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북쪽 나라의 변덕스러운 기후는 항상 문제가 되었으나, 이보르가 태어난 이래 이번만큼 위기였던 적은 없었다.
이보르는 그가 경외하는 신과 함께 신당에 갇혔다. 평소라면 시찰이니 뭐니 여러 가지 일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을 테지만, 지금은 산더미처럼 쌓인 눈과 매서운 눈보라 탓에 도저히 언덕 아래로 내려갈 수가 없었다.
이보르는 바깥 날씨만큼이나 동결된 그레타와의 관계에 불편함을 느꼈다. 하필이면 마지막 논쟁이 아버지를 거론한 문제였기에 마음이 더욱 불편했다. 아들의 말대꾸에 단단히 화가 난 그레타는 그 뒤로 이보르를 찾지 않았다. 그러나 강경파를 대표하는 수장답게 공식적인 일로 여러 차례 신당을 방문했다.
그레타가 거센 눈보라를 헤치고 신당까지 찾아온 목적은 간단했다. 그동안 마을을 지켜온 신의 힘으로 눈보라를 멈춰달라는 것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친 지 어느덧 보름, 그들이 언덕 위의 신당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는 동안 아랫마을은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계속해서 쌓이는 눈은 아무리 걷어내도 끝이 없었다. 잔뜩 쌓인 눈더미가 입구를 틀어막아 사람들은 집안에 갇혔고, 사냥꾼들은 연이은 악천후에 가로막혀 사냥을 나가지 못했으며, 식량조차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차라리 살아있기라도 하면 다행이었다. 그중에는 아예 눈사태에 휩쓸린 구역도 있었다. 그레타를 포함한 강경파는 험한 눈보라를 뚫고 매일같이 찾아와 이 사태를 방관하고 있었던 신을 나무랐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다. 이 북쪽에선, 아니, 이 세상 어디에서도 세계의 사랑을 받는 진정한 지배자의 손아귀에선 벗어날 수 없다.”
모든 항의와 읍소에도 신은 단호하게 일축했다.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너희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더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하지만 강경파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몇 번이고 언덕을 올랐고, 신에게 매달려 애원했으며, 가끔은 그를 재촉하고 다그치기도 했다. 금방 그칠 줄 알았던 눈보라는 결국 스무 날이 넘도록 이어졌다. 그러고도 날이 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사람들의 태도는 점차 거칠어졌다.
그런 그들에게 실망할 법도 하건만, 신은 어느 때고 차분하게 성난 군중을 다스렸다.
“눈보라로 인한 피해를 줄여주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본디 하늘의 뜻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한 마을을 다스리는 신이 ‘진정한 지배자’와 ‘하늘의 뜻’을 언급하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만약 다른 마을도 이처럼 특별한 힘을 가진 존재를 신으로 모시며 공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면, 아마 이보르도 조금쯤은 피가로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문제는 피가로를 탓할 일이 아니었다. 그 어떤 신님도 우연이 아니고서야 날씨를 바꾸지 못한다고, 마을에서 가장 오래 산 주술사 할아범이 말했기 때문이다.
이보르는 눈보라가 싫었다. 아버지는 이보르가 아주 어릴 적, 눈보라에 휩쓸려 명을 달리했다. 용기 내어 나간 첫 사냥이었다. 마을에서도 인정받는 집안의 자식이었던 아버지는 날 때부터 몸집이 작고 몸이 약해 사냥에 참여하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마을 내부의 일을 대신하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며 살았으나, 단 한 번 어머니에게 직접 잡은 사슴 모피로 만든 겉옷을 선물하고자 나선 것이 화근이 되었다.
노력은 가상했으나, 결과는 좋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사별 이후, 젊은 그레타는 어린 이보르를 혼자 키웠다. 이보르는 아버지의 모습을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무척 상냥하고 좋은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아버지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오직 어머니뿐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저 낭만과 환상에 빠진, 꿈에 절여진 남자라며 비꼬았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품은 분노는 상당했다. 어린 이보르는 언제나 생부와 비교당하고, 아버지의 욕을 들으며 자라왔다. 정말 끔찍한 시간이었다.
유년기의 좋은 기억이라곤 피가로를 만난 일이 전부였다. 그래서 이보르는 자상한 아버지를 앗아간 눈보라도, 아버지를 욕보이고 자식을 도구처럼 여기는 어머니도 모두 증오스러웠다. 그런 어머니가 이제는 지난 11년간 마을을 안전하게 지켜온 어린 신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그레타는 언제나 그랬다. 그레타는 또다시 이보르가 아끼는, 그에게 남은 마지막 하나까지 앗아가려 했다. 멋대로 이 고독하고 적막한 신당에 자신을 밀어 넣은 주제에, 간신히 있을 자리를 잡아가는 자신을 다시금 수렁에 빠뜨렸다.
그래, 꼭 지금처럼.
“눈보라 하나 멈추지 못하는 신은 공양을 받을 자격이 없다!”
“벌써 신기가 떨어진 거야.”
그들은 잘 알지 못하면서 불확실한 말을 지껄였다. 제멋대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은 피가로가 직접 나서서 자신의 힘을 보여주기를, 압도적인 힘으로 모든 논란을 불식시켜주기를 바랐다.
한 번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직접 물어본 적이 있었다.
“피가로님, 마을 사람들을 돕지 않으실 건가요? 모두가 간절히 도움을 바라고 있어요.”
“돕지 않는 게 아니야. 돕지 못하는 거지. 아무리 나라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는 강경파와 그들에게 선동된 마을 사람들, 불온한 기류를 견디지 못하고 조급하게 채근하는 이보르까지. 전부 다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법도 했지만, 피가로는 어떤 상황에서든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이 북쪽 나라에서 자연에게 간섭당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야. 많은 사람들이 자연에 의해 삶의 근간을 잃거나 목숨마저 위협받지. 이보르, 이 좁은 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온 너는 모르겠지만, 세상에는 한낱 마법사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재앙도 존재해.”
피가로는 태연하다 못해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고,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다정하고 상냥한 신, 여섯 살 어린 동생이자 11년간 동고동락해온 절친한 친구. 익히 알고 있는 모습인데도 이따금 피가로가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피가로와 자신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똑같이 정령에게서 힘을 얻고 있지만,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능력의 깊이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 그 때문에 피가로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지고한 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거였다.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피가로, 마법사라니?”
소중한 그가 낯설고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 또한 참을 수 없어서.
“아, 그렇지. 신…… 너희의 말로는 주술사라고 하던가?”
계속해서 눈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던 피가로는 이야기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고개를 돌려 이보르를 마주했다. 턱을 괸 채 웃으니, 녹색 동공이 가늘게 조여들며 희미한 빛을 발했다.
“신이라는 존재는 꽤나 흔하지. 사실 신이라고 해봤자 누군가가 만들어낸 존재에 불과해. 이 세상에는 나 말고도 수많은 신이 있어. 사람들은 절박한 순간에 신앙에 의존하고, 우리는 그런 그들을 구원하고 믿음에 보답하기 위한 존재야. 하지만 세상에는 인간에게 상냥하지 않은, 잔혹하고 제멋대로인 신도 있어. 그의 분노는 천둥벼락을 일으키고, 대지를 갈라놓지. 원래도 볼품없는 이 땅을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불모지로 만들어버리는 거야. 아마 이번 일도 인간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다른 신의 소행일 거야.”
“그 신은 날씨를 조정할 수 있는 거야? 그럼 그 자만 없으면…….”
중얼거리던 이보르는 입술을 꾹 깨물며 보다 명확한 어조로 말했다.
“피가로님, 당신이 그 신을 해치워줄 수는 없을까요?”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아마 나보다 강할 거야. 아니, 확실히 강해.”
피가로는 이보르가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봐, 이보르.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기후를 다룰 수 없어. 하지만 그 녀석은 아주 쉽게, 보란 듯이 해내지. 어느 쪽의 소양이 더 뛰어난지는 직접 대보지 않아도 알겠지? 인간들이 바라는 신으로서의 자격을 매기자면 또 다르겠지만 말이야.”
또다. 피가로는 이변을 일으킨 존재에 대해 짚이는 구석이 있어 보였다. 그들이 살아온 공간은 이 마을뿐이었다. 이 마을에서, 피가로와 이보르는 틀림없이 서로의 삶을 공유하고 있었다. 분명 함께 해온 세월은 비슷할 텐데, 피가로는 가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꼭 이보르는 듣을 수 없는 세계의 소리를 듣는 것처럼 말이다.
이럴 때면 어쩔 수 없이 불편한 심정이 들었다. 이보르는 문득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 일이 있은 날로부터 벌써 달이 두 번 차고 기울었다.
최근 이보르는 피가로의 밑에서 대리인 역을 수행하고 있었다. 대리인이라는 직책은 마을을 보살피는 신의 자리가 갑작스럽게 공석이 될 것을 염려해 생긴 자리였다. 그래봤자 허울뿐인 직위에 불과하다. 모른 척 외면하기에 그레타의 의도는 다분히 노골적이었다. 평소 신님을 언짢게 여기던 그레타가 촌장과의 긴 실랑이 끝에 출세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날, 이보르는 그저 막연히 알고 있던 신의 역할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게 되었다. 피가로는 이보르를 대동하고 외부에서 온 침략자를 처단하기 위해 움직였다. 마을을 보호하며, 죄지은 이들을 심판하고 벌을 내리는 것. 그것은 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추운 눈밭을 떠돌며 생활하던 외지인은 강력한 주술사였다. 신이 없는 다른 마을이라면 그 존재만으로도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주술사는 타인의 것을 탐내고 자신의 힘을 과신한 대가로, 결국 알록달록 찬연하게 빛나는 보석이 되어 부서지고 말았다.
한때 사람의 형태를 갖추고 있던 보석을 앞두고 피가로는 이보르에게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주술사 같은 게 아니야. 자연과 소통하고 정령을 지배하는 우리는 마법사다.”
피가로는 종종 주술사를 부정하고 ‘마법사’라는 호칭을 사용하곤 했다. 그 차이를 알지 못하는 이보르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피가로는 그런 이보르를 보며 못 말리겠다는 듯 작은 한숨을 쉬었다.
“이보르, 마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면 내가 가르쳐 줄까?”
“……피가로님께서요?”
‘나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네가 어떻게?’ 같은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그건 해서는 안 될 불경한 말이었다. 애초에 피가로는 태생부터 다른 특별한 존재였으니까. 피가로는 멍하니 있는 이보르를 보며 비웃음 엇비슷한 것을 지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 하지만 틀렸어.”
“……네? 아니, 응?”
“마력의 세기와 나이는 관계가 없다는 거야.”
피가로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보석을 주워 이보르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손을 내민 이보르는 건네받은 보석을 햇볕에 비춰보았다. 보석이 흩뿌리는 빛과 다채로운 아름다움에 넋을 놓고 있을 때였다. 툭 튀어나온 얼음덩이에 털털하게 걸터앉은 피가로가 다리를 꼬고 턱을 괴었다.
“이를테면, 아주 어린 모습으로 박제된 마법사도 있어.”
이보르는 순수한 마음으로 감탄했다.
“그런 걸 어떻게 알아?”
먼저 화두를 올렸으면서 피가로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는 장난스럽게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말을 돌렸다.
“그런 사소한 건 별로 중요하지 않겠지. 그보다 아까 제안에 대한 답이나 해봐.”
이보르는 눈을 가늘게 떴다. 피가로님이 방금 무슨 제안을 했었지? 기억을 더듬어보니 아마 마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했던 것 같다. 바로 답을 하지 못하고 고민하는 사이, 피가로가 조급하게 재촉해왔다.
“이보르, 대답해야지.”
“아니, 나는 됐어…….”
피가로는 매우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이보르가 여태 봐온 어정쩡한 주술사들과는 달리 정령들을 자신의 수족처럼 다루었다. 그의 도움을 받으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보르는 모난 돌처럼 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강한 힘을 가진다고 해도 그레타만 기뻐할 뿐이다. 어머니의 출세를 위한 권력의 도구로 이용당하는 것은 정말이지 질색이었다. 하물며 다른 것도 아니고, 지금의 자리에서 피가로를 밀어낼 도구로 사용된다면 더더욱 거절하고 싶었다.
피가로는 이런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을까? 혹시 모를 가능성에 피가로를 곁눈질했으나, 그는 뭉툭한 신발 앞코로 발밑의 눈을 둥글게 뭉치고 있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이보르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세상을 둘러보지는 않았지만, 마을이 좁다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넓은 장소에서 군락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마을 전체를 관리하는 피가로는 이보르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테지만.
“북쪽 나라에 사는 한, 자연의 간섭을 피해 갈 수 없다고 했죠. 그럼 터전을 바꾼다면…….”
피가로에게 이보르가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실현 가능성이 전무한 근본적인 해결책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북쪽에서 벗어나 다른 나라로 간다면 어떨까요?”
뜻밖에도 피가로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확실히 생각이 열려있구나.”
“……그건 피가로님도 마찬가지잖아요.”
이번만큼은 한 마디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가로는 “그렇네.”라고 말하며 즐겁게 웃었다.
“인간뿐만 아니라, 긴 세월을 살아가는 마법사조차 자신의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건 무척 어려워. 이 북쪽 나라 밖의 세상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말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신당의 커다란 창가에 한 쌍의 새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예고 없이 날아든 두 마리의 새는 각자 어두운 밤처럼 검은 깃털과 눈처럼 흰 깃털을 가지고 있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장난감처럼 아름다운 새들은 목에 검은색과 흰색이 조화롭게 섞인 리본을 매고 있었는데, 사람의 손이 닿은 티가 났다.
마침 피가로가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눈보라를 뚫고 날아온 전령은 이보르의 손에 작은 쪽지를 떨어뜨렸다. 새들이 누구를 찾아왔는지는 분명했다. 이 마을에서 그만큼 신비로운 일을 겪을 이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알면서도 쪽지를 펼쳐보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한 이보르는 그것을 펼쳤다.
쪽지에는 유려한 필체로 짧은 문장이 적혀있었다. 오랫동안 궁리했지만 도저히 읽을 수 없었다. 쪽지를 도로 원상태로 돌려놓기 위해 모서리를 접은 순간, 미세하게 번진 글자에 손이 닿으며 읽지 못한 문장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의무를 다하라.’
그 의미를 곱씹을 틈도 없이 피가로가 돌아왔다. 피가로는 부리로 깃털을 다듬는 새와 이보르를 번갈아보곤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었다.
“봤어?”
“아, 아뇨.”
생각하기도 전에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왠지 거짓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거면 됐지, 왜 허둥거리는 거야?”
피가로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이보르는 엉성하게 접힌 쪽지를 서둘러 피가로에게 건넸다. 피가로는 쪽지를 건성으로 들여다보더니, 손짓 한 번으로 재조차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소각시켰다.
쪽지에 적힌 내용을 제대로 읽기는 한 걸까? 연락을 취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 마을의 주술사는 늙은 할아범과 이보르, 그리고 그들과 격이 다른 존재인 신님밖에 없었다. 하지만 주술사 할아범은 절대 피가로에게 정령의 힘을 빌려 만든 새를 날려 보내거나 고압적인 태도로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피가로는 어린 시절을 전부 이곳에서 보냈다. 이보르가 알기로, 그런 피가로에게 마을 밖에서 따로 연락을 해올 만한 사람은 없었다. 분명 그럴 텐데,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작은 새는 여전히 창가에 앉아 보석 같은 눈으로 두 사람을 담아냈다. 이보르는 불안한 눈빛으로 새들과 피가로를 번갈아 보며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피가로님, 마을을 떠나시는 건 아니죠?”
“이곳이 멸망하지 않는 한 난 가지 않을 거야. 다시 돌아가는 건 지긋지긋해.”
이보르는 낯을 흐렸다. ‘대체 어디로 가신다는 거예요? 당신이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는 고작 일곱 살에 불과했잖아요.’ 신이라는 존재는 마을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신을 맞아들이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제 와서 마을을 책임지던 신이 우리를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신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피가로는 마을을 떠나서는 안 된다. 피가로가 없으면 더는 자신을 긍정해 줄 사람이 없었다. 그 없이는 이 외롭고 답답한 마을에서 숨을 쉬며 살아갈 수 없었다. 그렇다고 스스로 이곳에서 벗어날 자신은 또 없었다. 그는 태생이 자기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는 유약한 겁쟁이였다.
그러니 이대로 피가로의 명예가 실추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피가로가 배은망덕한 그들의 행동에 불쾌함을 느끼고 떠난다면, 그거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과오였다. 피가로가 절대 마을을 버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유일한 이해자가 사라져버릴지 모른다고,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피가로는 마치 그런 이보르의 고민을 아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야.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하지만 그걸로 네 마음이 편해진다면 제사 정도는 지내보도록 할까.”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이보르는 반색을 하며 피가로의 손을 잡았다.
“잘 생각했어. 아니, 잘 생각하셨습니다, 피가로님!”
“……나는 ‘피가로’ 쪽이 더 좋은데.”
피가로는 불만스럽게 입을 내밀었으나, 금방 이보르의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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