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시아 2


1.

“피가로님, 돌아왔습니다.”

푸른 머리카락이 바람에 하늘하늘 나부꼈다. 피가로는 한 갈래로 길게 땋은 머리를 어깨에 한 바퀴 두른 채, 커다란 나무 앞에 서있었다. 적갈색 머리를 낮게 묶은 청년이 망설임 없이 피가로에게 다가갔다. 건장한 체격에 비해 아직도 앳된 얼굴에는 덜 빠진 젖살이 남아있었다.

적갈색 머리의 청년, 이보르는 자연스럽게 피가로의 뒤편에 섰다. 기척을 느꼈을 텐데, 피가로는 이보르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상함을 느낀 이보르는 피가로를 자세히 보았다. 피가로는 높은 가지에 매달린 열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간 함께한 시간은 거짓이 아니라, 동그랗고 말랑한 얼굴에 자리한 감정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었다. 이보르는 불쑥 몸을 내밀며 물었다.

“나무 위로 올라가고 싶으신 거죠?”

피가로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이보르를 쳐다보았다.

“나도 이젠 어린아이가 아니야. 너랑 키 차이도 얼마 안 나는걸.”

“네, 네.”

“……전혀 듣고 있지 않네. 무거울 텐데 괜찮겠어?”

“제게 피가로님은 여전히 작고 가벼운걸요.”

피가로는 말없이 눈총을 던졌다. 이보르는 일부러 휘파람을 부르며 모른 척 외면했다. 그러자 피가로가 먼저 두 팔을 뻗어 목에 매달려왔다. 피가로를 끌어안은 이보르는 기합과 함께 그를 높이 들어 올렸다.

피가로는 곧바로 가지에 매달렸다. 정령의 도움을 빌리면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을 일이었지만, 피가로는 가끔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렸다. 일부러 사람에게 기대는 것은 신으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행동이다. 알고 있지만, 솔직히 말해 이보르는 피가로가 자신을 의지하는 게 기뻤다.

이보르에게 피가로는 마을을 지키는 신이기 이전에 동생 같은 존재였다. 처음에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벌벌 떨었으나, 지난 11년간 형제처럼 지내면서 어느새 피가로는 그에게 소중한 친구이자 보살펴야 할 존재가 되었다.

피가로는 가지 위로 대담하게 올라갔다. 무거운 털옷을 껴입고도 날렵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보르가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는 동안, 피가로는 나무에 열린 마시아 열매를 몇 개 수확했다. 그중 두어 개는 나무 아래 있는 이보르의 손에 떨어졌다.

피가로는 자신의 몸집보다 두꺼운 가지에 앉아 마시아 열매를 좌우로 쩍 갈랐다. 작은 알갱이를 하나씩 야금야금 먹는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본 이보르는 피가로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마시아 열매를 맛보기 시작했다.

올해 열매는 유독 시큼했다. 단맛보다는 입안이 찡할 정도로 신맛이 혀를 아릿하게 마비시켰다. 기후의 영향 없이 어디서든 잘 자라는 마시아 열매는 북쪽 나라에서 가장 흔한 과일이었다. 그 덕에 자라면서 수도 없이 먹어보았지만, 이번처럼 산도가 높은 건 처음이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흉작은 아니라는 점일까. 작년보다 맛은 없어도 수확량은 줄지 않았으니. 매년 식량 걱정을 하는 동네에서는 질보다 양이 중요한 법이다. 중독성 있는 신맛에 미간을 찡그리며 열심히 먹고 있는데, 가지에 걸터앉은 피가로가 두 다리를 장난스럽게 앞뒤로 흔들었다.

“어디 다녀왔어?”

“제사장에게요. 곧 피가로님의 열여덟 번째 탄신을 맞아 기원제가 열리니까요.”

“벌써 그런 시기구나.”

피가로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삐져나온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그는 무척 따분해 보였다. 하긴, 일곱 살 때부터 11년간 반복되어 온 일이라 그럴 만도 했다. 피가로는 한 번도 자신의 의무를 소홀히 한 적이 없지만, 하늘에 올리는 제사에 대해서는 언제나 언짢은 심정을 내비쳤다. 정황상, 피가로는 하늘에 기원을 올리는 일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 듯했다. 그 이유는 오로지 모두에게 신이라 불리는 그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마시아 열매는 어느새 딱딱한 껍질만을 남기고 있었다. 양손 전체에 붉은 과즙이 묻어났다.

북쪽 나라의 아이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각자의 일을 해야 한다. 용감한 아이들은 출세를 위해 사냥꾼이 되었고, 사냥에 소질이 없는 아이들은 마을에 남아 밭일을 했으며, 체격이 작은 아이들은 장사를 하거나 삯바느질 따위를 도맡았다. 드물게는 호기롭게 외부로 나가는 탐험대를 꾸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보르는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는 마을에서 손꼽는 유력한 집안의 자제였다. 부모의 입김으로 어린 나이부터 신당에 몸을 담은 이보르는 스물넷이 될 동안, 늑대 잡이는커녕 흔한 토끼조차 사냥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이 다양한 짐승과 자신의 피로 손을 더럽힐 때, 이보르는 다정하고 상냥한 신님을 보필하며 편안한 일상을 누리고 있었다. 여우털을 여러 겹 덧대 만든 이불은 따뜻하고 포근했으며, 품에 안긴 피가로는 부드럽고 좋은 냄새가 났다.

이보르가 살면서 두 손에 묻혀본 것은 물과 흙, 그리고 먼지. 기껏해야 지금처럼 마시아 열매의 과즙뿐이었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이보르는 손에 묻은 붉은 과즙을 바지에 대충 닦아냈다. 묻어난 양이 꽤 많았지만, 옷이 어두워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

그때, 아직 작은 마시아 열매 하나를 다 먹지 못한 피가로가 가지 위에서 몸을 기울였다.

“이보르.”

“……네?”

“단둘이 있을 때는 편하게 대하라고 했잖아.”

이보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단둘이 아니에요.”

그는 고개를 정면으로 고정한 채, 눈만 굴려 어딘가를 흘겼다. 피가로는 이보르가 곁눈질하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이보르의 말대로 나무 뒤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 사람은 평소에는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교묘하게 숨어 있었지만, 의식하고 나니 기척이 느껴졌다.

“감시가 붙었구나. 요즘 이런 일이 잦네.”

작게 중얼거린 피가로는 침착한 태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감시가 따라붙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요즈음 마을에선 불길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며 촌장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자리에서 내려올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그의 후계자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마을의 규칙에 따르면, 다음 촌장은 신의 뜻이나 공로가 가장 두드러진 사람으로 선출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마을은 온건파와 강경파, 두 파로 나뉘어 균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엔 신을 의심하거나 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으나, 최근 강경파는 자신들의 힘을 믿고 과감히 나서고 있었다.

그들은 노쇠한 촌장과 그에게 힘을 실어주는 신을 공개적으로 견제하고 있었다. 그 생각을 했더니 어김없이 두통이 일었다. 지끈거리는 미간을 살살 문지르고 있으니, 피가로가 가지에서 내려오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이보르는 익숙하게 팔을 내밀어 떨어지는 피가로를 간단히 받아냈다. 피가로를 단단히 받친 이보르는 그를 천천히 내려주었다. 피가로는 발바닥 전체가 땅에 완전히 닿을 때까지 기다린 후, 깃털처럼 가볍게 내려섰다.

피가로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한동안 뜸을 들였다. 그는 나무 뒤로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바라보다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내가 이렇게 철없는 모습을 보여줘도 괜찮을까?”

이보르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누군가 당신에게 그렇게 말하던가요?”

“그레타는 나를 싫어하잖아. 세상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걸 알아. 하지만…….”

피가로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만인에게 추앙받는 신님께서는 단둘이 있을 때 항상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이 더없이 사랑스럽고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보르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피가로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건 어머니가 이상한 거야. 피가로, 정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면 너를 싫어할 사람은 없어. 그건 내가 보증할게.”

피가로는 애매하게 웃으며 이보르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이보르, 마을의 신 노릇을 하고 있지만 난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난 지난 11년간 네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너를 지켜봐왔어. 이 세상에 나만큼 너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거라 자부해. 너는 강하고 아름다우며 자비로워. 너 같은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야.”

“과분한 칭찬이네. 나는 신이니까 그런 건 당연한데.”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조금의 고저도 없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피가로가 지금처럼 담담하게 자신의 입장을 받아들일 때마다 속이 편치 않았다.

“어머니는 그저 권력을 원할 뿐이야. 다음 촌장이 되어 마을을 입맛대로 주무시고 싶으신 거지. 개혁을 빙자한 독선을 저지를 생각인 거야. 촌장님의 말씀이 맞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해. 어머니는 이 좁은 마을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넓은 곳으로 가서 다른 이들을 약탈하며 배를 불리고 싶으신 거야.”

이보르는 조용히 미간을 찌푸렸다.

“시간이 지나면 어머니도 포기하실 줄 알았어. 그런데 어머니의 기대와 야망은 날이 갈수록 점점 커지기만 해. 내가 아닌 타인의 바람에 짓눌릴 것 같아.”

손에서 놓친 마시아 열매가 흙바닥에 떨어졌다. 붉은 열매는 축축하고 단단한 흙 위를 데굴데굴 구르다가 나무둥치에 걸려 멈췄다. 피가로의 시선이 이보르에게서 진흙이 묻은 마시아 열매로 옮겨갔다. 이보르는 딴청을 피우는 피가로를 품에 안아 정수리에 턱을 괴었다.

“나는 신이 되고 싶지 않아. 우리의 신님은 피가로, 너 하나로 충분해.”

“이보르, 내가 늘 하는 말이 있잖아. 네가 원치 않는 짐을 짊어질 필요는 없어.”

피가로는 그 흔한 한숨 한 번 쉬지 않았다. 그는 목에 두른 이보르의 팔에 차분히 손을 얹었을 뿐이다.

“너의 짐까지 내가 짊어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보르는 피가로를 쳐다봤다. 피가로는 비스듬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잎사귀가 드리운 그늘과 숱 많은 머리카락에 가려 안색을 살필 수 없었다. 이보르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을 리 없는데, 피가로는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

그날 오후, 부름을 받고 객실로 향한 이보르는 반갑지 않은 사람과 마주했다.

“이보르, 늦었구나.”

“……어머니.”

그레타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를 발견한 순간, 이보르는 표정을 관리할 수 없었다. 피가로를 대할 때 느껴지던 온화한 기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한껏 인상 쓴 얼굴이 대번에 표독스러워졌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내가 못 올 데를 왔니? 참 날카롭게도 구는구나. 내가 네 보금자리를 침략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보르의 날선 질문에 그레타는 역시나 날카롭게 맞받아쳤다.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한 이보르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마음 같아선 당장 내쫓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런 권한이 없었다.

“이보르, 일단 앉아라. 오랜만에 보는데 이대로 계속 서서 대화할 셈이니? 예의 없게 구는 걸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야.”

이보르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으나, 마지못해 자리에 앉았다. 두 달 만에 만난 모자 관계는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이보르는 매사 그레타의 눈치를 살폈고, 그레타는 마실 것도 거부했다. 그레타는 이보르가 무언가를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결국 이보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어색하게 그레타를 마주 봐야 했다.

이보르는 찬찬히 그레타를 살폈다. 그레타는 11년 전에 비해 얼굴 곳곳에 주름이 많아지고 확연히 늙어 보였다. 그럼에도 마을을 지탱하는 두 파 중 하나인 강경파의 수장답게 여전히 정정했다. 그녀가 쌓아온 연륜은 결코 무시할 게 못 된다. 한때 들개 같던 사람이 이제는 노련한 맹수가 되어 있었다.

그레타는 언제나 멋대로 기대를 품고,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운다. 이쪽의 의사는 아무래도 상관없이, 성공을 위해서는 자식조차 팔아먹을 수 있는 비정한 여자였다. 밉고 원망스러운 사람이지만, 그래도 이보르에게는 하나뿐인 부모이기도 했다. 부모를 증오하는 일은 단 한 번도 마음 편한 적이 없었다. 그레타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어째서 그들은 다른 가정처럼 평범하게 지낼 수 없는 건지 깊은 슬픔이 밀려왔다.

어질고 현명한 촌장과 신의 보살핌 속에서 나름 풍족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도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불안의 징조는 어디에나 있었다. 쇄국을 펼치는 온건파와 개국을 바라는 강경파는 현재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연로한 촌장이 생을 마감하고 나면 그 자리를 두고 한차례 피바람이 불 것이 분명했다.

엄연히 말해, 강경파가 원하는 것은 외부와의 교류가 아니었다. 그들은 다른 마을을 침략하고, 그들이 어렵게 얻어낸 것들을 모두 빼앗고자 했다. 그레타를 위시한 강경파는 타인의 시체를 쌓아 올리는 일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강경파가 정권을 잡는다면 지금처럼 평화로운 삶은 다시는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짐승처럼 타인의 피와 살을 뜯어먹으려는 그들의 주장은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이보르는 늘 그렇듯 안전하고 평화롭게, 익숙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강에 고인 물처럼 살고 싶었다. 아직 어리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자신조차 평화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알고 있는데, 그들은 왜 알지 못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보르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 그레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신님께선 요즘 어떻게 지내시니? 아직도 촌장님의 뒤에 숨어 상황을 관망하고 계시던가?”

“피가로님은 상관없잖아요. 제게 몇 번을 물으셔도 마찬가지예요. 피가로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레타는 그 말에 불쾌함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보르, 이 어리석은 것. 언제까지 못나게 굴 셈이니? 이 어미는 네가 네 아비의 길을 밟지 않았으면 한다.”

“어머니야말로 그만하세요. 평화를 바라는 게 뭐가 나쁜가요? 저는 더 나은 삶이나 개인의 욕망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고 싶지 않아요. 설령 피가로님이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어도 전 절대 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신이 되지 않을 거예요.”

말을 끝까지 마치기도 전에 흉터가 가득한 다부진 주먹이 나무 탁자를 내리쳤다. 그레타는 짐승처럼 번뜩이는 눈으로 이보르를 노려보았다.

“내가 너를 너무 배불리 키웠구나. 넌 부모의 후광을 등에 업은 것에 불과해. 너 스스로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지. 운 좋게 좋은 집안에 태어나 자신이 얼마나 유복한 생활을 누리는 줄도 모르고 평화를 운운하는 꼴이라니. 네 멍청한 아비가 살아서 이 꼴을 봤어야 하는데, 참으로 아쉬워!”

“말끝마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는 관계없잖아요! 이미 어릴 적에 돌아가셨는데!”

“그래도 꼴에 부모라고 편을 드는 것을 보니 우습구나. 그 돼먹지 못한 남자는 기를 쓰고 변호하면서 살아있는 어미를 거들지 않는 건 대체 무슨 심보니?”

“어릴 적 망자를 욕보이지 말라고 가르쳐 준 것은 바로 어머니세요. 어머니께서는 하늘이 두렵지 않습니까?”

“한배를 탄 부모에게 아주 못하는 말이 없어. 신님을 곁에서 모시는 너라면 알 텐데? 우리의 신도 결국 똑같은 피가 흐르는 인간에 불과하다는걸. 하늘이라고 해봤자 특별할 것 없어. 단지 태생과 뻔뻔함의 차이일 뿐이지.”

“어머니! 어떻게 그런 불경한 말을…….”

“시끄럽다! 따지고 보면 다 네가 미덥지 못한 탓이 아니냐? 저를 생각하는 어미의 마음도 모르고 건방지게 언성이나 높이다니!”

“…….”

이보르는 입을 다물었다. 머리는 여러 생각으로 소란스러웠지만, 정작 더 할 말은 없었다. 그레타와의 대화는 매번 이런 식이었다. 몇 번을 반복해도 결과는 같았다. 오로지 자신만 옳다고 믿는 이 사람과는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이보르는 거친 숨을 씨근거리며 엉망으로 요동치는 감정을 다잡았다. 그러고도 끝내 가슴이 불편해서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 그레타에게 등을 돌렸다.

“……소란 피우지 말고 이만 돌아가세요. 어머니, 여긴 신님을 모시는 신당입니다. 당신 같은 무뢰배가 돌아다녀도 좋은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레타는 아들의 반항을 참지 못했다. 이보르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그레타가 고함을 쳤다.

“이보르!”

“얌전히 가세요, 억지로 끌어내기 전에!”

그러나 이번에는 이보르도 지지 않았다. 이보르는 칼날처럼 매서운 목소리로 외쳤다. 온후하고 사랑스러운 어린 신과 어울려 자라온 그로서는 드물게 예민한 반응이었다.

그레타는 이보르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더는 버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령 순종적인 자식이 아니더라도 그를 적대하는 것이 득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노골적인 태도가 싫었다. 이런 속물적인 사람이 세상에 하나 남은 가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이보르는 그레타가 떠난 뒤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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