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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ㅅㅇ 06

ㅇㅅㅇ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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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임시제목. 나중에 몰아서 수정함.

처음으로 스승의 몸을 보게 된 건 그분의 제자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이런 말은 조금 우스울지도 모르나, 같은 사내의 몸을 보는 것은 익숙했다. 그도 그럴 것이 파우스트가 나고 자란 시골에서도, 그리고 군영에서도 틈만 나면 사내들이 홀딱 벗고 단체로 목욕을 하는 것이다. 타인의 나체를 보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건 때와 장소를 가릴 만큼 여유로운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나 그럴 것이다.

옛날의 파우스트는 타인의 몸을 보고 아무런 감상이 없을 정도로 무던한 사람이었다. 물론 그 경애하는 스승인 피가로조차 예외는 없었다. 그러기에 스스로 피가로의 시중을 자처할 수 있었던 거였다. 제안을 받은 피가로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을지언정 파우스트의 의지는 확고했다.

타인의 몸에 대해 어떠한 감상을 가지게 된 것은 전부 알렉 때문이다. 이 부분은 확실하게 남 탓을 해두겠다. 피가로는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스승이었으나, 그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존재했다. 그 시절의 그는…… 상당히 문란했다. 한때 진심을 바쳐 모셨던 스승을 뒷담 하고 싶지는 않지만 정말이었다.

군의 손님으로 있을 때, 피가로에게는 언제나 불쾌한 소문이 따라붙었다. 야심한 시각에 막사 천막을 반쯤 걷고 밤손님을 기다린다던가, 오고 가는 사람 막지 않는다던가, 누구든 원하기만 하면 기꺼이 하룻밤 온기를 나눠준다는 둥.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다 비슷한 말이었다.

모두가 피가로의 정조를 의심했다. 그들은 파우스트의 스승이자 군의 손님으로 불려온 현인에게 감히 무례를 범했다.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파우스트는 언제나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지만, 그럴 때마다 피가로는 의중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띤 채 그를 만류했다.

피가로는 앞서 같은 말을 반복하며 까마귀처럼 쪼아대는 이들에게 진절머리를 낸 바가 있었다. 어리석은 이들에게 일일이 일침을 놓는 것이 피곤했을 것이다. 변치 않는 인간의 본성에 염증을 느끼는 건 이해하지만, 그 행동이 불필요한 오해를 낳을까 봐 심히 염려되었다.

우려를 내비쳐도 피가로는 여전히 고집스러웠다. 피가로는 난처―솔직히 말하면 이때 가슴이 두근거렸다―한 듯 웃으며, 정정해 봤자 아무짝에도 소용없다고 말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파우스트는 아직도 피가로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피가로가 그렇게 말했던 이유는 머지않아 밝혀졌다.

소문은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가로는 실제로 매일 밤마다 자신의 막사에 사람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정확히는, 피가로가 불러들이는 게 아니라 초대하지도 않은 손님들이 멋대로 그를 찾아갔다. 피가로는 소위 말해, 오는 사람 안 막고 가는 사람 안 막는 성격이었다. 그는 누구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어울렸다. 설령 상대가 바라는 것이 추잡한 육욕뿐이라고 해도 말이다.

진실을 알게 된 파우스트는 입을 비죽였다. 설령 피가로가 상대를 침실로 끌어들였다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파우스트 개인의 불신과는 별개로, 쌍방의 동의가 있었다면 피가로가 그런 악질적인 소문에 놀아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물며 상대가 먼저 스승을 갈망했다면 더더욱.

“피가로님, 어째서 그런 무뢰배를 상대해 주시는 겁니까? 감히 첨언하건대, 반드시 뒷말이 나올 겁니다. 제자 된 몸으로 그 치들이 피가로님에 대해 떠들고 다니는 걸 도저히 좌시할 수 없습니다.”

“안타깝고 사랑스럽지 않니? 가슴의 빈 공간을 무언가로 채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건.”

피가로는 매사에 느긋하고 여유로운 태도였다. 그런 그의 반응에 득달같이 달려든 파우스트만 몹시 민망해졌다. 스승이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피가로를 찾은 거였지만, 아무래도 기우였던 것 같다.

피가로는 파우스트가 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고귀한 사람이었다. 신이 심혈을 기울여 빚은 조형물처럼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그는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버려지는 경험 같은 건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피가로는 소중한 누군가를 잃거나, 누구에게도 필요로 여겨지지 않는 기분 따위는 알지 못할 터였다. 그러니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공허에 대해 유한 표현을 사용할 수 있는 거였다. 그것이 당연하면서도 부럽게 느껴졌다.

파우스트가 멍하니 넋을 놓고 있을 때였다. 피가로는 작은 한숨을 쉬며 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뒷말은 이미 나오고 있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외로운 자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밤이었을 테니.”

서운하다거나 속상하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피가로는 굉장히 유감스러워 보였다. 그 모습을 본 파우스트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들에게 결투를 신청하겠습니다.”

이래서야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일러바친 것처럼 보인다. 당연하게도 피가로는 파우스트를 만류했다.

“파우스트, 잠깐…….”

“몇 명이든 상관없습니다. 감히 당신을 모욕한 무도한 이들을 제가 전부……!”

파우스트는 끝까지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피가로가 나쁜 말을 일삼는 그의 입을 다짜고짜 손으로 틀어막은 것이다.

“기다리라니까. 넌 누굴 닮아서 성격이 그렇게 급한 거니?”

“아버지요.”

파우스트는 욕지거리를 토해내듯 성질 급하게 말을 뱉었다.

“저희 아버지가 성격이 무척 급하셨거든요.”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실제로 빈말이 아니었다. 파우스트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무척 성급한 사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파우스트가 처음 마법의 자질을 드러내자마자 그를 버리고 떠났으니 말이다.

당시 파우스트는 아주 어렸으나, 어렴풋이 집을 나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늙고 병든 시아버지와 연약한 아내, 어린 아들과 젖먹이 딸을 둔 그 사람은 집안의 기둥이자 가족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떠나면 가족이 얼마나 비참한 나날을 보내게 될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사람은 떠났고, 원래도 풍족하지 않았던 파우스트의 집안은 완전히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작은 짐 가방을 챙겨들고 떠나던 날, 아버지는 바지자락을 거머잡고 애원하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법사는 자연의 섭리를 어긴 존재야. 삿된 것은 반드시 집안에 화를 불러오지. 그건 가족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야! 파우스트는 곁에 있는 사람들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거다. 네가 그 아이를 끝까지 싸고돈다면 나도 더 이상 방법이 없어. 너는 결국 우리 가족의 평화 대신 아들을 선택한 거야.’

그때는 화를 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너무 무서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부당한 대우에 맞서 그 사람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나는 어머니만이 아니라, 당신의 자식이기도 하다고.

엄습하는 옛 기억으로 금세 기분이 가라앉았다. 파우스트는 침울하게 고개를 숙였고, 피가로는 한동안 물끄러미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만, 눈치 빠른 피가로는 본능적으로 불길한 기류를 읽어냈다. 그는 어설픈 위로를 건네는 대신 파우스트가 마음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아무튼, 파우스트는 피가로가 불미스러운 소문에 휘말리는 게 싫었다. 말도 안 되는 소문의 주축이 되는 것도, 그로 인해 모두가 피가로를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는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아무리 거부감을 느껴도 파우스트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기묘한 유희를 즐기는 스승을 설득해 그만두게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경애하는 스승과 하룻밤을 보낸 이들을 찾아가 보복할 수도 없었다.

매일 아침마다 엉망으로 구겨진 옷가지를 정리하고, 정사를 나눈 것치고 아무런 흔적도 없는 스승의 몸에 깨끗하게 다림질 된 새 옷을 걸치며 파우스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뇌에 빠져들었다. 하필 고민을 털어놓거나 하소연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의 곁에는 온통 관계라곤 가져본 적 없는 동정 총각들만 가득했기 때문이다.

파우스트는 일평생 신을 믿으며 금욕적으로 살아왔다. 그는 사람들이 그토록 쾌락에 목매는 까닭을 알지 못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속세의 무료함에 질려버린 피가로는 괜찮지만, 다른 사람이 성적 욕망에 휘둘리는 건 꼴 보기 싫었다. 누군가는 제멋대로라며 욕을 할지 모르나, 부러지지 않은 이상 팔이 안으로 굽는 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스승의 문란한 사생활은 혁명군 내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모두가 흐린 눈을 하고 있지만, 실상 주둔지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뜨거운 밤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한 번은 몇 안 되는 친우들에게 마음을 터놓은 적이 있었다. 어째선지 레녹스를 곁눈질 한 알렉은 난처하게 웃었다.

“피가로님은 정말 선을 잘 지키셔. 그 많은 사람과 얽혔는데도 아직까지 심각한 추문은 돌지 않잖아. 뒷말이 오가긴 해도 실제로 믿는 사람은 얼마 없지. 그분의 결백을 믿는 신자들이 알아서 자정작용을 만들고 있어.”

시선을 받은 레녹스는 어리둥절한 낯이었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레녹스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는데, 그건 앞으로 알렉이 할 모든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간접적인 의사 표현이었다.

“피가로님의 승은을 입은 사람이든, 피가로님을 따르는 이들이든. 누구든 문제를 일으켰다면 내가 나서서 중재했을 거야. 우리 부대의 시끌벅적한 호사가들을 잠재우다니, 얼마나 뛰어난 처세술을 펼치고 계신 걸까? 이쯤 되니 본받고 싶은걸.”

“알렉, 말조심해.”

“파우스트님…….”

파우스트는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차라리 그쯤에서 멈췄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알렉은 전혀 개의치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파우스트, 내 성격 알잖아. 아무리 군의 손님이자 위대한 대마법사라고 해도 아닌 건 아닌 거야. 하물며 네 스승이라고 특혜를 줄 수는 없지. 너도 귀찮은 구설수에 시달리고 싶지는 않잖아.”

“알렉님, 그 말씀은…….”

레녹스가 말을 마치기 전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파우스트가 활화산처럼 폭발했다.

“내가 말조심하라고 했지? 피가로님은 그런 식으로 함부로 입에 담아도 되는 분이 아니야!”

파우스트는 말 그대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화를 냈다.

“알렉님, 파우스트님, 싸우지 마세요.”

가만히 이야기를 경청하던 레녹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특별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알렉을 쳐다보는 레녹스의 시선은 한시라도 빨리 사과할 것을 종용하고 있었다. 성실하고 우직한 부하의 조용한 채근은 물론이거니와, 평소에는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친구의 모습에 당황한 알렉은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알았어, 알았어. 내가 실수했어. 사과할게.”

파우스트는 소꿉친구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치솟은 분노는 가라앉았으나, 불편한 기분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였다.

알렉은 성격이 시원하고 유쾌했지만, 대신 깊이 생각하지 않고 말을 뱉는다는 단점이 있었다. 좋게 말하면 뒤끝이 없고, 나쁘게 말하면 경박한 구석이 있다.

알렉을 위시한 혁명군은 오로지 더 나은 삶을 바라는 마음 하나만으로 이 자리까지 왔다. 거짓 한 점 없이 조화로운 미래를 설파하는 알렉은 그 열정으로 젊은 피를 쉽게 포섭했으나, 일부 노장들의 반감을 샀다. 세월의 지혜를 가진 이들은 깊숙이 내린 뿌리처럼 올곧은 알렉의 성정이 조만간 발목을 잡을 거라 했다.

파우스트는 그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당장 내일을 위해 사는 젊은이들과 달리 그들은 더 먼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혁명군을 이끄는 수뇌부는 이미 스스로 신하를 자처하며 알렉을 그들의 왕으로 모시고 있었다.

지금의 알렉을 보면 아마도 답답할 것이다. 알렉은 소위 좋은 사람이었다. 왕위에 오른 알렉은 누구보다 백성들을 위할 테지만, 그것만으로는 한 나라를 이끌어갈 수 없었다. 정치에 대해 무지한 파우스트도 언변과 처세술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알았다.

마침내 그 순간이 도래하면 알렉이 가진 단점은 지금보다 악화된 형태로 부메랑처럼 돌아올 것이다. 확실히 그런 의미에서는 피가로의 수업을 듣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나이를 먹고 성숙해지면 그때는 지금보다 나아질까? 막상 그날이 오면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그새 스승의 버릇이 옮은 파우스트는 한숨을 쉬며 뺨을 쓸어내렸다.

“먼저 사과해 줘서 고마워. 그리고…… 과하게 반응해서 미안하다. 너도 알다시피 피가로님은 내게 특별한 사람이라 그분을 헐뜯는 말을 들으면 좀처럼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어려워.”

“괜찮아. 네가 피가로님을 끔찍이 위한다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니까.”

“이상하지 않아? 보통 이렇게까지는 안 하잖아.”

“전혀요. 제자가 스승을 공경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오히려 좋은 거 아니야? 자기 역할에 충실하다는 거잖아. 난 네 그런 점이 좋더라.”

“그야 넌 원래 성실하고 우직한 사람을 좋아하니까.”

알렉과 레녹스는 한마음 한뜻으로 파우스트를 위로했다. 그러나 정말로 위로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파우스트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애매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마주했다.

그때, 대화에 열중하던 알렉이 문득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알렉은 넋 나간 사람처럼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저렇게 입을 벌리고 있다가 날벌레가 들어가지는 않을지 심히 걱정스러웠다.

알렉이 무엇을 그리 열심히 쳐다보는지 궁금했던 파우스트는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목을 비틀었다. 그러자 아주 조금 걷어낸 천막 너머로 밖이 내다보였다. 알렉이 뚫어져라 바라보는 곳, 그러니까 그들이 머무는 막사 반대편에는 정확히 피가로의 막사가 있었다.

입구에 선 피가로는 어떤 여자를 배웅하고 있었다. 상대는 피가로보다 키가 두 뼘 가까이 작았다. 파우스트는 부대 내 사람들을 대다수 외우고 있었지만, 항상 동료들의 정면만 마주쳐온 그에게 여자의 뒷모습은 굉장히 낯설었다.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은 갈색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닿는다는 사실 말고는 신원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가 없었다.

파우스트가 눈을 흐리게 뜨고 기억을 되새기고 있을 때였다. 어느 순간 알렉이 탁자 위에 대뜸 팔꿈치를 올렸다. 파우스트와 레녹스를 번갈아 보는 그는 개구쟁이처럼 짓궂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보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두 사람 다 경험 있어? 솔직히 말하면…… 나는 없다.”

부끄러운 듯, 즐거운 듯,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부터 진작 알아봤다. 친절한 부연 설명은 없었지만, 알렉이 언급한 ‘경험’이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심란한 걸 목격해서 기분이 안 좋은데 이제는 친구까지 고민에 한 획을 더하고 있었다.

파우스트는 단박에 짜증을 냈다.

“뭘 비밀스럽게 속닥거리는 거야? 네가 경험이 없다는 건 누구나 알아.”

목청으로는 알렉도 지지 않았다.

“어떻게 자신하는데? 너 몰래 숨겨놓은 여자가 있을 수도 있잖아!”

“봐, 지금처럼 큰소리치는 게 바로 특별한 사람이 없다는 증거야. 네 성격에 있었다면 진작 자랑하러 왔겠지.”

누가 소꿉친구 아니랄까 봐,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으르렁거리는 동안 레녹스는 이상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쯤에서 중재가 들어왔어야 하는데 말이다. 슬슬 그만 싸우고 상황을 무마하고 싶은데 레녹스가 말려주지 않으니 곤란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눈빛을 교환했다.

“레녹스, 너 설마…….”

“레노, 아니지? 우린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

모두의 관심을 한몸에 받은 레녹스는 쑥스러운 듯 턱을 긁었다.

“설마가 맞습니다. 저는 경험이 있습니다.”

그 말에 두 사람이 보인 반응은 각기 달랐다. 파우스트는 침음을 흘렸고, 알렉은 크게 탄식했다.

“언제 처음 경험해 봤는데? 상대는 연상? 아니면 연하?”

“대체로 연상이었어요.”

“잠깐, 지금 ‘대체로’라고 했어? 벌써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랑 관계를 가져봤다는 거야?”

뜻밖에 알렉은 예리했다. 그는 파우스트가 놓친 부분을 정확히 짚어냈다. 몹시 감명받은 파우스트는 다시 봤다는 듯 알렉을 쳐다봤다.

“제가 살던 마을에는 나이 드신 분들이 많으셔서…… 제 입으로 말하긴 뭐 하지만, 많은 분들이 관계를 권유해 주셨어요. 마을에 젊은 사내가 몇 없는 게 원인이 아니었을까요?”

“그런 이유만은 아닐 거야.”

“맞아. 레노, 장담컨대 넌 어디 가도 꿇리지 않는 훌륭한 사윗감이야.”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레녹스에게 연인, 혹은 그에 준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건 충격이었다. 일부러 숨기려고 한 건 아니겠지만, 그간 어떠한 암시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냐면 감히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예상치 못한 진실을 접했을 때의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파우스트는 레녹스에게 자신이 모르는 사정이 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알렉은 달랐다. 알렉은 진지하게 레녹스가 총각이 아니라는 사실에 놀란 듯했다.

“그래서, 어땠어? 다른 사람들 말처럼 막 굉장한 느낌이야? 당연히 혼자 위로하는 것보다 훨씬 기분 좋겠지?”

“여러 의미로 굉장하긴 하죠. 말씀드렸다시피 제 상대는 거의 연상이라 보통 여성분께서 먼저 이끌어주셨어요. ‘전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가만히 누워서 기분 좋아지면 돼. 그러다 여유가 생기면 조금씩 움직여도 되고. 방법은 내가 알려줄 테니까.’라는 말을 자주 들었었죠.”

“연상의 여인이라는 건 엄청나구나…….”

“그러게…….”

알렉과 파우스트는 순수한 의미로 감탄했다. 조심스럽게 입을 틀어막는 그들의 얼굴은 발그스름하게 달아오른 채였다.

“조금 더 자세히 들려줘.”

“자세히 들어서 뭐 하게?”

“아니, 나도 언젠가 참고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때를 대비해서 미리 알아두자는 거지.”

“한심하다, 한심해.”

“그 뒤는 어떻게 되었냐면…….”

과한 흥미를 보이는 알렉을 차갑게 매도하기도 잠시, 파우스트는 아닌 척해도 착실히 귀를 기울였다. 두 사람이 레녹스가 들려주는 경험에 한창 심취해있을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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